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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 6. 04:14

지각대장 존 - 초딩은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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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동화책이 되어버린 '지각대장 존'
하지만. 이 동화의 다소 파격적인 끝내용 때문에 한동안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한 책이라고 한다. 아마 많은 어른들도 이 책을 보면 '애들 보는 책이 이래도 되는 거야?' 라고 할 것이다.

어린이는 환상의 세계에 산다. 아이들은 보자기 하나로 슈퍼맨을 상상하고 하늘을 날으는 꿈을 꾼다. 놀이공간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로 꿈과 희망을 펼치며 살아간다. 새벽녘 등교길에 나섰던 존이 악어를 만나 따돌리는 모험을 하는 것처럼...

어린이날 행사에 참가했던 어떤 아이가 '초딩은 놀고 싶다'라는 버튼을 달고 있었다.
학교 끝나면 피아노 학원으로 속셈학원으로...엄마도 힘들고 아이도 힘든 릴레이가 계속되고 있다. '애들은 놀아야지' 흔히들 말하면서, 다른 애들 공부하는데 내자식은 놀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어느새 우리나라 아이들은 돈 잘버는 사람이라는 한결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아이를 버릇없는(?) 존 처럼 만들고 싶지 않다면. 아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봐야 할 것이다.

초딩은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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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대장 존

-이재복 <이야기 밥>


좋은 그림동화를 읽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늘 곁에 두고 읽는 그림동화가 몇 권 있다. 「지각대장 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동화에는 아이들에게 귀를 빌려주지 않고, 아이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나무라기만 하는 입이 큰 선생이 나온다. 내가 바로 그런 선생이었다. 아이들 가슴에 펄펄 살아 있는 상상력을 빼앗고, 그 빈자리에 온갖 잡동사니 지식과 정보를 채워 넣지 못해 안달하는 선생이었다. 이래서 나는 이 그림동화를 늘 참회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지각대장 존」은 이렇게 시작한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림책 첫장을 펼쳤을 때 나는 먼저 글에 눈이 갔다. 이미 글에 갇힌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라면 아마 글보다는 그림에 먼저 눈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 건조한 사실을 뒷받쳐 주는 배경그림은 뭔가 심상치 않다. 왜 이렇게 어두울까? 작가는 왜 아이가 학교 가는 아침 하늘을 이렇게 우울하게 그렸을까? 하늘 가득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고, 그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흰 구름이 떠 있다. 아직 어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아이가 학교에 갈 리는 없고. 이 그림 한 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자니 뭔가 우울하고 불길한 일이 아이 앞날에 일어날 것 같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고 아이 앞에는 곧은 길이 아니라 구부러진 길이 쭉 놓여 있다. 이 무덤덤해 보이는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까? 빛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을 아이는 조심조심 매우 긴장해서 걷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장을 펼쳤다. 밝은 화면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의외다. 역시 나는 그림은 저 멀리 두고 글로 눈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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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가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불쑥 나와 책가방을 덥석 물었습니다. 존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악어는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지!  판타지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하수구에서 악어가 나오다니.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 장면에서 존은 분명 현실공간에 서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나오는 "한참을 가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불쑥 나와 책가방을 덥석 물었습니다. 존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악어는 놓아주지 않았습니다."란 장면에서 존은 아무런 설명 없이 하수구에서 악어가 튀어나오는 판타지공간으로 옮겨가 있다.


보통 그림이 없는 글로만 읽는 동화에서는 현실에서 판타지세계로 넘어갈 때 그 판타지세계로 넘어가는 매개수단이 납득할 만하게 그려져 있다. 꿈을 통해 판타지세계로 넘어가든지, 아니면 양탄자 같은 마술도구를 타고 넘어 들어가든지, 아니면 나무나 구멍 같은 신비한 자연물 속에 빨려 들어가든지 하여 자연스럽게 판타지세계로 들어갔음을 알린다. 그런데 이 「지각대장 존」에서는 이러한 매개수단에 대한 설명이 없이 갑자기 판타지공간으로 넘어 들어가 악어가 나온다고 했으니, 가뜩이나 상상력이 메마른 어른들이 보기에는 더욱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존이란 아이가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분명히 하수구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노는 존재이니까 이 하수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로 출발할 때 아이의 마음은 잠시 어두웠다.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학교에 버티고 있는 그 들으려 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훈화하기를 좋아하는 선생님, 벌주기 좋아하는 선생님을 생각할 때 아이의 발걸음은 무겁고 표정은 굳고 그래서 그 아이의 마음에 비친 하늘도 그렇게 어두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간을 사는 존재이기에 고통도 깜빡 쉽게 잊는다. 어느 한 가지 생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이는 언제 어디서건 놀이감을 찾는다. 이래서 아이는 하수구를 보고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하였다. 그 하수구에서 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반짝이며 온갖 상상을 하였다.


존이 하수구 앞에서 한 상상은 결코 엉뚱한 상상이 아니다. 하수구에서 악어를 상상하는 것, 이건 너무나 아이다운 생각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상상인 것이다.


존은 학교 가는 길에 이 날따라 하수구에 호기심이 생겨 하수구 안을 들여다본다. 어둡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아이는 순간 죽음을 생각한다. 늪을 생각한다. 강을 생각하고 그 강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이의 상상을 타고 튀어나온다. 그래서 존은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면 하는 상상을 하다가 아주 진짜 악어가 나온다는 기분에 젖어 하수구에서 장난(놀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이렇게 현실에 발딛고 서 있는 존재이면서 늘 놀이를 통해 판타지세계로 여행하는 꿈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동화를 이해하려면 판타지세계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고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으레히 판타지세계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읽히는 어른들(작가들)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였던 사람들이면서도 어릴 때 가졌던 판타지세계에 대한 감각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만 갇혀 있는 판타지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각대장 존」에서 존이 만난 악어는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악어이다. 존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존이란 아이의 놀이 속에 등장하는 악어는 모습이 아주 단순화되어 있다. 그림 속의 악어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동심은 단순하니까 아이들이 상상하는 놀이 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이렇게 단순하며 해학적인 것이다. 나무들이나 가로등이나 해나 하늘이나 모두 단순하고 그야말로 예술의 옷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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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장을 넘겼다. 존은 여전히 악어와 오는 놀이공간 속에 존재한다. 악어가 가방을 물고 놓아주지 않아 존은 장갑 한 짝을 휙 던져 주었다. 악어는 물었던 가방을 놓고 장갑을 물었다. 이 행복한 놀이 공간 속에서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고, 누가 더 낮은 자리에 있는지 구별이 없다. 이제 존은 악어와 완전한 친구가 되어 있다. 존은 입고 있던 옷색깔마저 악어와 같아졌다. 마치 레오 리오니의 그림동화 「파랑이와 노랑이」에서 파랑이와 노랑이가 서로 사랑하여 몸을 합치니 녹색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그런데 오른쪽 그림을 보라. 놀이공간 속에서 아이는 그 자신 삶의 주인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깨어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자연의 아이를 억누르지 않고 아이는 어른에게 눌리지 않아 목숨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놀이공간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 공간 속으로 돌아온 아이는 너무나 작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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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욱 답답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존이란 아이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건 존이 가는 길이다. 이 아이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아이는 지금 서둘러 곧은길을 가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길인가! 지름길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길이다. 어른들은 한 가지 눈에 보이는 삶의 목표에만 얽매어 있는 존재니까 더 이상 돌아가는 길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름길보다는 오히려 돌아가는 길에 더욱더 관심이 많다.


아이들이 아침에 집을 나와 학교까지 가는 길을 보라. 아이들은 천천히 걷는다. 학교까지 가는 목표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다. 만나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이런저런 구경거리가 생기면 다 참견하며 걷는다. 아이들은 이렇게 목표보다는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 더 관심이 많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요구하는 빠른 지름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구경거리가 가능한 굽은 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는 악어와 놀다가 학교에 늦고 말았다. 굽은 길을 걸어가면서 길에서 만나는 자연에게 하나하나 눈인사하며 걷던 아이가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간다. 현실공간으로 돌아온 아이는 지금 직선의 길을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곧은 길, 그 길은 놀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놀이가 존재하지 않는 길을 존은 달리고 있다. 허겁지겁 학교에 달려갔으나 존은 늦고야 말았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너 늦었구나. 게다가 장갑 한 짝을 어디다 두고 왔니?"


선생님이 하는 말에 존은 이렇게 당당히 말하였다.


"예. 늦었어요, 선생님. 왜냐면요 학교에 오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나와서 제 책가방을 물었어요. 제가 장갑을 한짝 던져 주니까 그제서야 놓아주었어요. 장갑은 악어가 먹어 버렸어요."


존은 비록 학교라는 놀이가 끼여들 공간이 없는 기계적인 사고만을 요구하는 공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아직 놀이공간(판타지공간) 속에서 이 냉엄한 현실 공간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존의 가슴에는 아직 따뜻한 상상의 피가 살아 있기에 밝은 목소리로 선생님에게 이렇게 거침없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존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정답이 있는 교육에만 길들여진 선생님은 존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학사모를 쓰고 손에는 지시봉을 들고 반듯하게 서 있는 선생님의 모습은 방정환의 말을 빌면 '냉랭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개벽, 1923.1)의 부정적인 면을 상징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불행하게도 동심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선생님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하였는가. 선생님은 아주 높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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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 하수구에 악어 같은 건 살지 않아. 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는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300번을 서야 한다. 알겠지?"


하고 벌을 주었다. 이래서 존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반성문을 300번이나 써야 했다. 존에게 벌을 준 선생님은 아동문학을 알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적어도 아이가 학교 오는 길에 악어와 놀다 늦었다면, 벌 대신에 대단한 흥미를 갖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교육은 대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아이들과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당연히 아동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화는 듣는 사람을 위한 문학이다. 보통 아이들은 귀를 통해 먼저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에 눈을 통해 읽는다. 이래서 동화는 듣는 사람을 위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뭐니뭐니해도 듣는 귀가 먼저 뚫려야 한다. 어른들 가운데는 아이가 빨리 글을 깨우쳐 혼자서 책을 읽어 주길 바라는 이도 있다. 이건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듣는 귀가 꽉 막혀 버리면 읽는 눈도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아직 읽는 눈이 열리지 않은 아이들이 사는 곳까지 내려가 그들의 듣는 귀에 호소하는 문학이다.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동화를 소리내서 읽는다. 옆에 듣는 귀를 크게 열어 놓고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생각하고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아이들은 고맙게도 듣는 귀가 잘 열려 있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좋아한다. 그런데 간혹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시큰둥하고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듣는 귀를 열어 놓게 하려면 먼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아이들은 잘 듣는 귀를 타고났는데, 이런저런 이로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까 아이들 가슴에도 여러 가지 아픔이 꽉 들어차 그만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듣는 귀를 막아버렸다. 그깟 시시하고 고통만 주는 이야기들, 늘 훈계만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지겨워하고, 아이들은 그들의 고통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너희들의 고통이 뭔지 들어보고 싶으니 가슴 속 이야기를 해 달라고 선생님이 먼저 귀를 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때 아이들도 선생님에게 귀를 빌려줄 것이다. 이래서 들려주는 것보다 들어주는 게 먼저다. 아이들 독서지도는 순서가 있다. 아이들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그런 다음에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그 다음에 한 발 더 나가 읽는 눈을 열어 주어야 한다.


히틀러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본 회퍼란 목사가 있다. 본 회퍼는 봉사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봉사가 '들어주는 봉사'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들어줄 귀를 찾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들어야 하는 것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찾고자 하는 귀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형제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곧 하느님의 말씀에도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도 말을 지껄여대기만 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시작이며, 결국 경건한 말로 나열된 영적인 주절거림과 성직자의 생색내는 태도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참고 들을 수 없는 자는 곧 논지에서 벗어난 말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과 진실로 대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시간이 너무 귀중하여 결코 침묵으로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국 하느님과 그의 형제들을 위한 시간은 갖지 못하고 오로지 그 자신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위한 시간만을 갖게 될 것이다."(「본 회퍼의 선택」,청하,1986.114쪽)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은 들어줄 귀를 찾고 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을 하려고만 한다. 본 회퍼의 말을 빌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들어주는 봉사'를 해 달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건 잘못이다. 먼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들어주는 봉사'를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가슴이 열리고 듣는 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의 아픔이 먼저 보이는 사람들만이 들어줄 수 있다. 이래서 듣는 행위에는 남 앞에서 나의 아픔을 뒤로하는 희생의 의미가 들어 있다. 남을 먼저 받드는 섬김의 의미가 들어 있다. 동화는 아이의 자리에서 보면 '듣는 문학'이지만 어른의 자리에서 보면 '들려주는 문학'이다. 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 듣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동화를 듣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들어주는 봉사'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씨앗이 심어질 것이다.


이야기 듣는 시기를 충분히 거치지 않고, 혼자서 읽는 문학 시기로 접어든 아이들은 사람과 멀어져 책 속에 갇혀 버리기 쉽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책 속에 갇혀 버린 아이들 마음속에는 미처 들어주는 봉사를 기꺼이 해 낼 수 있는 그런 넉넉한 마음이 형성되기 어렵다. 아이들이 글을 빨리 깨우쳐 혼자 책을 읽을 줄 안다고 좋아할 것만은 아니다. 독서 지도는 읽는 눈보다는 들어주는 귀를 더욱 밝게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온갖 소리를 귀담아 듣는 그런 침착하고 온순한 귀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읽는 문학의 시기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선생님이 동화는 듣는 사람을 위한 문학이란 사실을 알고 판타지세계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아이들에게 귀를 빌려주고 '들어주는 봉사'하는 자리에 섰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그래 학교까지 오는데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단 말이냐. 그 이야기 좀 더 들려줄래." 하였을 것이다. 아이의 가슴에 환하고 밝은 놀이공간, 상상의 공간, 판타지의 세계가 학교까지 와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이에게 '귀를 빌려줄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우리 학교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호기능'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죽은 학교'가 다시 '살아 있는 학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들어주는 봉사가 이루어지는 공감으로 학교가 바뀔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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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다음 날 서둘러 학교에 갔다.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쓰는 고통을 겪었지만 아이는 아직도 동심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그래서 이 날 존은 풀숲을 지나다가 사자를 만났다. 풀숲에서 사자 한 마리가 나오더니 바지를 물어뜯었다. 존은 가까스로 나무 위로 기어올라 사자가 지쳐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래서 이 날도 존은 허겁지겁 학교로 갔지만 늦고 말았다. 선생님은 늦게 온 존에게 왜 늦었느냐고 물었고, 존은 다시 "덤불에서 사자가 튀어나와 바지를 물어뜯는 바람에 늦었다."고 말하였다. 역시 선생님은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며 이번에는 구석에 돌아서서 400번을 외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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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심한 벌을 두 번이나 받고 또 존은 다음 날도 서둘러 학교로 간다. 그림동화를 이루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반복효과이다. 되풀이는 대개 세 번을 한다. 두 번이나 너무 싱겁고 어딘지 미련이 남는다. 네 번은 너무 지루하게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세 번이 가장 적당하다. 미련이 남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그래서 삼 세 번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 날도 존은 서둘러 학교에 가면서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가다 존은 또 장난기가 발동하여 파도가 밀려오는 상상을 하고, 파도 타는 놀이를 하였다. 이 날도 학교에 늦었고, 선생님은 왜 늦었느냐고 물었고, 존은 다시 파도 때문에 늦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며 반성문을 500번이나 쓰라 하였다.


여러 번의 반성문을 쓰고 난 다음 학교에 가는 날, 이 날만은 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게 반성문을 쓰면서 알게 모르게 존의 가슴에 살아 있던 밝은 동심의 빛, 상상력의 빛, 놀이를 향한 열정은 점점 사그러지고 어른들이 원하는 제도의 틀 속에 갇혀 길들여진 것이다. 이 날만은 학교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존은 제 시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날 존은 학교를 향해 곧장 걸어간 것이다. 닫힌 어른들이 요구하는 삶대로 살기 위해 한눈 팔지 않고 곧장 달려간 것이다. 이제부터 존은 아이다운 아이에서 어른들의 마음에 맞는 애어른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냉랭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으로 점점 변해가게 되었다. 이제 존은 '몸으로 사는 존재'에서 '관념으로 사는 존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이는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전히 꿈을 꾸는데 몸으로 살아가는 아이가 꾸는 꿈과 관념으로 살아가는 아이가 꾸는 꿈은 분명 다르다. 관념으로 살아가는 아이의 꿈속에 나타나는 판타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풍부한 놀이는 존재하지 않고 자신을 억압하는 선생에 대한 분노, 증오가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되어 나타난다.


학교에 가는 동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이가 교실에 가자 선생님이 털복숭이 고릴라에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려 있다. 아이는 선생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빨리 좀 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 동네 천장에 고릴라 같은 건 살지 않아요, 선생님." 하고 딱 잘라 말하였다.


선생님의 고통에 대하여 아이는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노는 존재에서 분노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도 존과 같은 아이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놀이를 통해 현실세계와 판타지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아이들이 놀이공간을 빼앗길 때 분노하고 절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제 더 이상 놀이공간에서 꿈꾸는 존재로 남아 있지 못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이 외로운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다음 날도 학교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지각대장 존」은 이렇게 아이가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장면으로 끝이 나고 있다. 그러나 동화는 끝이 났는지 모르겠으나 이 동화에 등장하는 존의 삶은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이 동화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존이 빼앗긴 놀이공간을 다시 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 원할 것이다. 귀를 빌려주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선생의 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존 버닝햄은 이 놀이가 허용되지 않는 세계, 우울하고 어두운 현실세계에 던져진 아이가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를 독자들 스스로에게 찾도록 하고 있다.


아동문학은 어두운 시대에 던져진 동심이 삶의 문제로 어떻게 고통받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문학이다. 요즘 어린이문학을 하는 동네에서는 누구나 좋은 창작품이 나오지 않아 걱정이란다. 예전보다 아이들을 위한 책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상대적으로 감동이 있는 작품집은 적다. 왜 그럴까? 그건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동심관, 자연관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각대장 존」에 등장하는 존과 같은 아이가 겪고 있는 아픔은 지금 우리 나라 아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버닝햄은 「지각대장 존」을 통해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숙제를 남겨 주었다. 버닝햄은 이 외롭고 쓸쓸한 아이, 아침이면 일어나 학교를 향해 서둘러 떠나는 아이가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달라고 화두를 던져 놓았다.


존이라는 아이는 어느 시대든지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그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어두운 시대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이 진정 구원에 이르는 동심의 발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